한국영화사랑 오발탄


정재연   pm.11:59, Monday ( 2411hit )
시월애

강수연과 안성기가 주연했던 이현승 감독의 데뷔작 "그대 안의 블루"(1992)는 이 영화가 페미니즘이니 아니니 말이 많긴 했지만 과거 우리나라 영화가 보여 주지 못했던 탁월한 영상미를 선보였다는 데에 있어서 만큼은 이견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묘사된 여성도 이전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었구요.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던 김현철과 이소라의 듀엣곡이 크게 히트했었고 지금까지도 노래방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 안의 블루"에서의 여세를 몰아 연이어 발표한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4)는 전작과 너무 유사한 주제와 내용을 계속 다루어 많은 관객들이 실망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월애"는 이현승 감독에게 있어서는 6년 만에 발표하는 일종의 재기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간 박철수 감독 등 다른 감독들의 영화에서 아트디렉터로서 그 이름 석자가 간간히 보이긴 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5년 이상을 자기 작품없이 지내던 과거의 흥행 감독이 새로운 영화 한 편을 선보인다는 건 아무래도 재기했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흔히 그림이 이쁜 영화를 'CF 같다'고 하게 되는데 "시월애"는 CF 중에서도 가장 그림이 이쁜 CF 같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특히 이정재가 요리하는 장면은 조명 탓이기도 하겠지만 정말 눈이 부시더군요. 영화 전체가 단 한 장면에서도 소홀함이 없는 정성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현역 영화감독들 가운데에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 감각을 잃지 않은 채 이 정도의 영상미로 꽉꽉 채워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시월애"의 주제의식은 이현승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대 안의 블루"와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에서 주로 다루었던 직업에서의 성공과 남성과의 사랑 사이에 갈등하는 새로운 시대의 여성상에 비하면 "시월애"에서의 여주인공은 오히려 사랑만이 전부인 그런 모습이죠. 어떤 주제의식이 더 의미있고 중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던 감독 이현승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기식 그림에 담아 관객에게 선사하는 장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저는 김기덕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처럼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는 작가로서의 영화감독들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다루게 되든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장인적 연출가 역시 뛰어난 영화감독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정재는 어느새 한석규 만큼이나 항상 안정감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배우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1994)에서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가 잠시 표류를 하더니 "정사"(1998)를 통해 이정재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영역을 과시했었죠. 정중동의 남성미라고나 할까요. 이후의 "태양은 없다"(1999), "이재수의 난"(1999), "인터뷰"(2000)", 그리고 이번 "시월애"까지 모든 작품에서 고른 연기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해서 '이정재가 골라 출연한 영화도 일단 한번 가볼 만 하다'는 이야기가 곧 자리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전지현은 "시월애"가 영화 데뷔지요. 아, "화이트 발렌타인"이란 영화가 앞에 있었군요. "시월애"에서의 전지현은 좋은 그림을 보여주는 데에 일조하기는 하지만 배우 전지현으로서의 인상을 남겨 주기에는 아직 역부족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맡은 배역의 캐릭터가 그닥 인상적이질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직은 부족한 연기력을 이현승 감독이 솜씨좋게 가려준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도 별로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좋은 연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대 안의 블루"에서부터 이현승 감독과 인연을 맺은 김현철이 "시월애"의 음악을 맡았더군요. 영어로 된 주제곡도 직접 부르고. 이소라 역시 스캣송으로 참여한 것 같았습니다. 이거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전에 다른 글에서 영화들의 기본 설정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잘만 만들면 식상할 겨를 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었죠? "시월애"는 한자 제목이 말해 주듯이 '시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주인공들이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교신한다는 설정은 "동감"의 그것과 유사하고 그것도 편지라는 전통적인 수단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부분에선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레터"를 생각나게 합니다.(이정재가 잠시 독감에 걸려 고생하는 장면은 특히) 하지만 "시월애"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다른 유사 작품을 연상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잔잔한 가운데에서도 관객을 끝까지 집중시키는 이현승 감독의 균형잡힌 연출력과 독특하면서도 호소력있는 이야기 구조가 "시월애"를 성공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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